지난 7일 프레시안 시사회 당첨으로 왕십리에서 봤다.
<천리길>이 그렇게 슬픈 노래인지 처음 알았다. 흙 먼지 모두 마시면서, 흰 옷 입고 궤짝 짊어지고 보따리에 달구새끼 싸든 사람들이, 제 땅을 천리도 마다하고 걷지만, 초저녁 별이 빛나도, 밥냄새 구수하게 풍기며 돌아오라고 불러 줄 엄마는 없다. 굽이굽이 피와 눈물과 비명과 살점들 뿐이었던 그 길.
<웰컴 투 동막골>도 그랬지만, 영화는 다소 극적이고 한편으로는 판타지의 느낌이다. 특히 초반이 그렇다. 이 무거운 현실에서 짓눌리지 않기 위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장치일지도 모른다. 혹은, 원래 우리 삶의 원형이라는 것은 그렇게, 희극적인지도 모른다. 도박에 빠진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가네 마네 실랑이 하는 젊은 부부와, 머루 따먹고 멱감고 노느라 학교에 늦는 새까만 아이들과, '바둑 두던 사람 어디 갔나'하고 상대를 약올리는 원두막에서 소일하는 동네 할아버지들과, 난리가 났다는데 학교 숙직이 걱정이던 처녀 선생과, 치고박고 울고불고 놀려대고 투닥거리다가 소꿉놀던 머시매 가시내들과….
그렇게 노근리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훑어가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시계를 살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건 고통의 시간들 뿐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철길을 엉거주춤 뛰어오다 산산조각이 난 할아버지와, 포격이 지나간 뒤 엄마를 찾아 찢어져라 울어대는 돌쟁이 아기와, 포사격이 쏟아지는데 솜이불로 막아보겠다고 엎드려 벌벌떠는 그 허약하고 무식한 사람들과, 끝까지 미군이 도로꾸를 보내줄거라 믿었던 순진한 신식양반과, 총탄 아래서 제 아이와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치지 않고 울어대는 갓난 애를 타박하던 엄마와, 젖 물려 줄 어미도 없이 울어대는 핏덩이를 물에 빠트릴 수 밖에 없었던 젊은아비와….
고래가 넘실, 넘실. 아마도 그 긴긴 삶의 상처도, 넘실, 넘실.
흔한 말이지만, 어떤 허구도 사실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덮어진 사실들, 가리워진 발자국 속, 그 초라하고 연약한 삶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 보잘 것 없고 흔한 삶과 죽음을 존재하게 하는 힘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 하기 시작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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