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보는것
참을성
아는것
말하는 재주
성실함
요즘엔 이런것들이 절실하다
무늬산호수 건강. 추가 05:14-02:22
진실로 '거대한 소수'이기 위한 평가와
반성
1년 전 총선 직후의 한 대담에서 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치학)는 다음과
같은 말로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의 의미를 짚었다. "현재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구체적인 정책적 대안을 법률화하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이 해야 할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뭐가 문제인지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민주노동당만이 … 다른 얘기를 할 수 있는
정당입니다. 그런 걸 국회의사당 올라가서 할 수 있습니다."([정치체제, 근본적 변혁 시작됐다], <이론과 실천> 2004년 5월)
과연 '그런 걸' 민주노동당의 10명의 국회의원들은 해냈는가? 이것을 묻고 나름의 답을 찾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들어간 지 1년 밖에 안 됐는데, 벌써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은 3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평가도 그렇게 조급한 것만은 아니다.
- 민주노동당의 의정활동 방향 - '거대한
소수' 전략
2004년 총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당발전특별위원회'가 만들어져 원내 진출
이후를 준비하는 치열한 논의들이 벌어졌다. 이 때 여러 가지 쟁점이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민주노동당에게 국회의원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당내의 어떤 이들은 정치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대로 입법 활동의 참여에서 원내 진출의 의의를 찾았다. 이들에게
민주노동당 의원의 핵심 역할은 의회에서 보수정당들과는 다른 진보적 정책 대안을 제시하여 입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이런 견해를 가진
당원들은 또한 대중정당은 국회의원 같은 명망 있는 정치인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긍정했다. 이 흐름을 꿰뚫는 문제의식은 '적응',
즉 의회 공간·현실 정치에 대한 적응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나타났다. 이들은 진보정당의 정치가 의회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회의원의 기본 임무가 비록 입법 활동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계급 세력관계상 진보적인 목소리가
실제 관철될 가능성도 적을뿐더러 자칫하면 대한민국 국회라는 한계 많은 공간에 당의 활력과 가능성을 종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의원은 원내보다도 원외의 사회세력·사회운동과 접촉하고 이들을 조직하는 데 앞장서는 게 더
중요하다. 의원들이 당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당이 의원들을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 흐름에서는
전반적으로 '적응'보다는 오히려 '극복', 즉 의회 공간 안에서 그 한계와 대결하고 이를 넘어서는 것이 보다 강조되었다 할 수 있다.
사실 민주노동당은 이 중 어느 한 쪽을 정답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내 진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잠정적인 합의가
만들어졌다. 그것의 대외적 표현이 바로 '거대한 소수' 전략이다. 적응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교과서적인
원내 활동만으로 당 안팎의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캐스팅보트 역할 등을 강조할 수는 없었는데, 이런
주장이야말로 극복론자들의 눈에는 기존의 의회 룰 안에 당을 가둬놓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color=#993366>'거대한 소수' 전략은 한 마디로 원내 '소수'정당이면서도 '거대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달리 말하면 '거대한 다수'(보수양당)와 직접 대결하겠다는 것이며, 캐스팅보트 등의 역할에 만족하는 '왜소한
소수'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보수정당들이 무시하거나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쟁점들을 앞서서 제시하여 보수 대 진보의 대립선을 만드는 것이
'소수'이면서 '거대'해질 수 있는 제1의 조건이라면, 사회세력을 직접 조직하고 대중운동의 힘을 극대화하는 게 그 제2의 조건이다. 10석의
한계 속에서 적응론자나 극복론자나 모두 이러한 지향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
'과잉'적응의 1년, '기능인'이 된 10명
따라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임기 1년차에 대한 당 내부로부터의 평가
기준은 명확하다. 그것은 적응론도 아니고 극복론도 아니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기준과도 물론 다르다. 당내의 기준은 '거대한 소수' 전략의 성패
여부다. 그리고 바로 이 기준에 견주어 보았을 때 지난 1년의 총점은 그리 높지 않다.
사실 원내에 처음 들어가서 그 정도
활동이라도 한 게 어디냐는 평가도 있다. 필자 역시 일정한 적응기의 필요성에 대해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적응을 해도 너무
했다는 데 있다. 적응론의 원래 논지와도 상관없는 '과잉'적응이 나타나고 있다.
의원들은 상임위원회에 한 사람씩 배치되고 나서
해당 분야의 입법 활동에 과도하게 매몰되기 시작했다.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원심력은 더욱 강해졌다. 10명의 의원은 국회 의사 일정에 누구보다
충실한, 저마다의 우물 속의 정책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 민주노동당에는 법안 심사와 행정부 감사를 업으로 하는 '기능인' 10명이 생겼다.
그런 일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어디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거대한 소수'라는
민주노동당의 의정 전략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게 바로 이러한 기능인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 전략을 실현하려면 10명의 의원들은 '정치가',
그것도 대중운동과 결합된 정치가라는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모델을 창출해내야 한다. 그런데 기능인은 이러한 기대에
부합하기는커녕 기성 정치인의 자질에도 미달한다.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color=#993366>'소수'정당이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선택과 집중에 실패하고 있다. 작년에 민주노동당이 발의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3개 법안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법'이었다. 이 법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이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동당이 특별히 뭘 잘해서가 아니라) 지난 수년간의 치열한 장애인 운동 덕분이었다.
앞으로도 민주노동당이 제출하는 법안은 아마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거나 아니면 만장일치로 통과될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항상
엄청난 대중적 압박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수준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민주노동당의 약속을 일부라도 결코 실현시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3년밖에 안 남은 제한된 시간 안에 그걸 해내자면 극소수의 사안을
엄선해서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의원들은 상임위원회마다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나머지 역할은 당원들이 떠맡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10명의 의원들 모두가 그 두 서너 과제의 미친 듯한 전도사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둘째, 원내 활동의 중요한 순간마다 잘못된 전략적 판단들이 나타나고 있다.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했지만, 정치야말로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며 곧 메시지다. 국회의원이 제시하는 정책도 정책 이전에 메시지다.
국회의원이 던지는 표도 투표 행위 이전에 메시지다. 인간사의 모든 메시지들 중 가장 간절한 것은 연애편지일 것이다. color=#993366>의원들의 모든 활동은 마치 그 연애편지처럼 절박한 메시지여야 한다. 그것도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에게 부치는 편지여야 한다. 한데, 적어도 지금까지의 의원단 활동은 그렇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만 들겠다.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이 한창일 때 이해찬 국무총리 인준 투표가 있었다. 이 때 의원들 다수의 견해는 '총리로서 별 문제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마치 무슨 체조경기 심사위원이라도 돼서 어느 점수판을 들까 고민하는 사람들 같은 태도였다. 신임 투표를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은 당 최고위원회의 논의 과정에서야 나왔다. 소위 의원단과 최고위원회의 불협화음이 이야기된 것이
이 때부터지만, 대중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정치 행위의 본령을 제대로 포착한 쪽은 후자였다.
또 다른 예는 작년 말
열린우리당·민주당과의 '개혁 공조' 시도다. 바로 이 시기에 정부의 비정규직'보호'법안(사실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을 '보호'하는 법안)이
공개되어 비정규연대회의의 열린우리당사 점거 농성 등 반대 투쟁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의원단은 이 사안을 공조 전술 추진을 중단해야 할 변수로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과의 협상의 주요 조건으로서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 경우에는 잘못된 메시지의 발신이 문제였다. 의원단의
선택은 누구에게나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보다 '개혁' 쪽을 중시한다는 메시지로 다가갔다. 당내에 '열린우리당 2중대가 되자'는 문건이 나돌아
물의를 일으킨 바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발송된 유해 전파를 중계한 것에 불과했다. 그 전파의 발원지는 의원단이었다.
셋째,
너무도 소중한 4년의 임기에 벌써부터 누수와 낭비가 나타나고 있다. 국회 일정이 정치 일정이
아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의원의 하루하루는 마치 국회로 출근하는 공무원 마냥 국회 일정에 따라서만 돌아가는 것 같다. 정치에는 그것과는 다른
리듬이 있다. 리듬에는 여운이 있고 자연히 다음 소리에 대한 기대가 따른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정기국회 이후 그 여운을 남기고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최근 민주노동당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당 소속 의원들의 활동 모습이
잘 안 보였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잘못들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 1년 전의 마음 졸이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자
이 글을
준비하면서, 1년 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의원 후보 예비선거에 나선 지금의 의원들이 당시 당원들에게 제시한 공약들을 훑어봤다. 그 중에는
"2005년 메이데이에 국회의사당 본관 앞마당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대회를 갖겠다"는 사뭇 가슴 뛰는 약속도 있었다.
어쩌면 해답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른다. 불과 1년 전의 그 가슴 졸이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그 마음으로 지난 1년과
남은 3년을 바라보자. 진보정치의 이상이 현실정치의 틀과 끊임없이 긴장을 빚으리라는 것은 그 때부터 이미 분명하지 않았는가. 그 때는 포부였던
게 지금은 새삼스럽게 변명 거리가 될 수는 없다.
이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언제 비례대표 의원직을 반납해야 할지 모른다는 각오로,
다음 번 출마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다시금 당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전투들에 일선 사령관으로 나서야 한다. color=#993366>한 동안 국회의원이라는 새로운 임무에 취해 있었다면 이제는 다시 한 번 노동자·민중의 지도자라는 말에서 자신을 확인해야
한다. 소위 '동료' 의원들의 눈총이 아니라 당신들의 진정한 동료, 냉소 어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과 희망을 잃은 가난한 서민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거대한 소수'의 무기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그럴 때, 10만의 당원들이 원군으로 나설 것이다. 100만의
새로운 지지자가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 합류할 것이다. 1000만의 민심이 흔들릴 것이다.
이계삼 선생님이 월간 <우리교육> 4월호에 쓴 글입니다. 전교조 운동과 교육운동 전반에 관해
생각해오던 것을 쓴 것인데, target=_blank>다음카페 나락한알에 있는
것을 퍼왔습니다.
지난 3월 18일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관악위원회 당원 교육토론에서 발제를 해주신 이철호 선생님이 교육에
있어서 빈곤과 양극화, 불평등을 강조하시며, 이에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나서 옮겨왔습니다. 이계삼 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부분
공감합니다. 물론 이게 옳다고 말하기보다는 한번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계삼님은 교육 공공성을 빈곤과 대립시키고 있는데, 저는 교육공공성이 이 땅의 빈곤 및
불평등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교육공공성이라는 것이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고, 또한 저보다는 교육현장에 계신 분이 더 잘 알지 모르겠지만요.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입니다.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입니다.
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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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교육’
이계삼(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1.
김진경 박복선 선생님께
<우리교육> 2월호에 실린 두 분의 대담을 읽고 제법
오랫동안 머뭇거리다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경남 밀양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두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대학 시절부터
저는 두 분의 성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1학년 무렵 두 분이 함께 엮어낸 <꽃이 사람보다 아름다울
때>라는 산문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접했던 기억이 거의 없던 제게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산문’이라는 부제가 너무나 신선했거든요. 그 책에 실린 글들도 참 좋았고, 그래서 그 책을 여러 권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저는 박복선 선생님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선생님일 거라 혼자 상상하기도 했지요). 또 이런 기억도 있네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과
학생회실에서 빈둥거리던 저는 선배들이 기타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곁에서 따라부르곤 했는데, 김진경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벗이여, 어서 오게나 움푹 패인 수갑 자욱 그대로’ 하는 부분의 그 아름다운 선율과
서늘한 서정이 얼마나 좋던지요. 군대 다녀와서부터는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교육>은 도서관 잡지실에서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앞머리에 실린 편집장 박복선 선생님의 짧은 에세이를 참 좋아해서 우선 그것부터 먼저 펼쳐 읽기도 했어요.
전교조, 해맑은 웃음을 위하여 -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도, 그리고 이 글을 서신 형식으로 쓰려고
맘먹은 것도 그 대담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새삼스러운 반가움 때문입니다. 교직에 들어 조금씩 경력을 쌓아갈수록 커져만 가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무언가, 우리 교육이 처한 이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제가 마음으로 기대고 또 삶의
사표로 모시는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다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가능성에만 최선을 다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그분들 또한 이
상황에 대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의 대담 기사를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그 신랄함과
날카로움에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기사를 두 번째 읽었을 때 저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이른바 ‘밀양
고교생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용돌이를 현장에서 겪은 뒤끝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익히 보셨을 테지만, 근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이
사회는 밀양의 고등학교들과 지역 사회와 그 속의 ‘패악한 아이들’을 실컷 두들겨 팼습니다. ‘맞을 땐 맞더라도, 토론 좀 하자’는 내 속의
열망에 대해선 ‘잠자코 맞고 있어!’라고 윽박지르더니, 분이 좀 풀릴 무렵에는 총총히 다른 곳으로 떠나가더군요. 때린 자나 맞은 자나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커다란 상흔만 남긴 실로 기묘한 한판 소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월, 학교는 언제나처럼 다시 문을
열었고, 저는 ‘비평준화지역 2등그룹에 속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평반(우수반 아닌)’이라는 긴 꼬리표가 달린 학급의 담임으로, 도서관/학교신문
담당자로, 일주일 도합 스물여섯(보충수업, 야간 특별수업 포함) 시간의 수업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오락가락합니다.
2.
선생님, 오늘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야간 자율 학습을 감독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과 차례로 면담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눈 열명 중 세명이 편부/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내신 성적 50~60%대에 속하는, 그래도 성적향상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어 노동하는 부모들의
‘고래심줄’같은 돈으로 심야 학원까지 다니지만 모의고사를 치르면 절반을 채 맞추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수시모집으로 부산 경남권의 사립대학에
근근이 입학할, 그래도 졸업하고 10년쯤 뒤에는 파출소 순경으로, 포크레인 기사로, 국밥집 젊은 사장으로 스승의 날 꽃다발을 들고 옛 담임을
찾아오기도 하는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을 하나 둘 번호 순으로 복도로 불러내 공부 방법을 조언하고, 신상의 변화를 물으며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은 수줍어 말이 없습니다. 혼자만의 이야기끝에 녀석들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함에 손등에다 제 손을 포개어도 봅니다. 이 아이들 중 또 얼마는, 주로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 테지만, 가난과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는 결국 ‘즐기고 저지르는’ 어떤 삶의 길에 접어들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가 근무하는 이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 안에도
남김없이 아로새겨진 이 세상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저는 아득해집니다. 학교와 세상의 담장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려서 우리는 ‘학교’ 아닌 ‘세상’
속에서 근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 안에는 이른바 ‘교실 붕괴’라는 교육적 불가능이, 입시라는
꼭지점을 향한 가없는 질주가, 천박한 중산층 의식에 깊이 물든 교사 집단의 안일과 무기력이, 초고속 성장의 단물을 흠뻑 빨아들인 소비문화의
광풍이, 풍요와 빈곤, 이 둘로 딱 쪼개진 한국의 경제가, 양심과 도덕을 제멋대로 조롱하는 타락한 한국 사회가 모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더니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굉음을 내며 분출합니다. 가까이는 작년 연말의 대규모 수능 부정행위 사건과 우리 지역 아이들의 성폭행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만성질환자가 되어 잠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도 어느새 제 자리로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거기 있고 성장기 아이들이 12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다가 스무살이 되어
빠져나오는 것만이 분명할 따름, 이제 우리 교육의 장에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3.
선생님. 최시한 선생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겠지요. 저도 그 소설의 주인공 선재처럼 전교조가 결성되던
1989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해직된 선생님이 나오진 않았지만, 한동안 온 학교를 팽팽하게 감돌던 그 긴장된
공기와, 몇몇 젊은 선생님들의 긴장된 결연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사회의식이란 전혀 없는 촌무지랭이였지만, 저는 그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선배들이 저희들을 ‘전교조 세대’라고 불러주더군요. 눈물이 흔한 편이기도
하지만, 저는 학교 민주광장에서 전교조 결성 전후를 기록한 사진전을 둘러볼 때마다, 거리 집회 와중에 대오 한편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뛰어나오는
해직교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가르치는 것이 싸우는 것이라면,
싸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이리라’던 백무산 시인의 싯구절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선하고 약한
자들의 번민과 그것을 뚫고 나온 용기는 늘 보기 애처로웠습니다만 그것으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교조 교사! 나도 저런 존재가
되리라, 마음 속 깊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도종환 선생님의 시가 있었습니다.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 햇살이 교실에도 가득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것’. 돌이켜보면, 전교조 선생님들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은 20대 초반의 제 위태로운 자의식을 지탱해준 최선의 도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또한
전교조 교사로 살아갑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밀양지회에서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선생님들은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또한 정의롭습니다. 올해 초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내내 발을 동동구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던 것에서 보듯, 전교조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순수한 조직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늘 이런 질문에 시달립니다. 과연, color=#993366>‘지난 16년간 전교조는 아이들의 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혹은, ‘전교조는 지난 16년간
이 땅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크기를 얼마만큼 줄여주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자명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전교조는 7만의 조합원에 전임?상근 활동가들의 인건비로만 연 50억원을 지출하는, 시민사회의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었지만, 교실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갑니다. 두 분 선생님이 대담에서 거듭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 교육운동은 지난 십수년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만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그 방황의 뚜렷한 증거는 작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거에서
대립했던 주장은 평범하게 요약하자면 전교조를 ‘아래로부터 복원하자’는 입장과 ‘강력한 투쟁을 통해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color=#993366>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주장들이 모두 ‘교실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 정작 ‘교실 안’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입장은 제겐 한 사물의 다른 두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전교조
복원’을 이야기했고 방법론의 차이를 지나서 결국 같은 결론-교육공공성 수호-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전교조 조직 복원을 통해
교육공공성을 둘러싼 참호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때, 이것이 ‘교실 안 아이들’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때 어느 책에서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아시겠지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곳은 거친 땅이고, 반대편은 좋은 땅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는 뗏목이 너무나 소중한지라 강을 건너 산길을 가면서도 뗏목을 이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뗏목을
이고 가지요?”라고.
저는 이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 바로 지금 전교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교조 운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커다란 덩치의 조합 대중조직 ‘전교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전교조는
아이들의 변화를 교육적 성과로 이어가는 일보다는 스스로의 존립과 유지에 더 큰 동력을 쏟아부어야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런 이야기겠지요. 전교조는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사랑에 기초한
조직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힘과 싸우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조직(시스템)에 자신의 교육적 열정과 사랑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면이 없는 물질이므로, 물질은 자신의 운동법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전교조가 구축한 교육운동 시스템은 그 속에 담긴 교사들의
교육적 양심, 사랑과 뒤섞여 존재하지만, 물질이 정신을 밀어내는 인간사회의 법칙 속에서 시스템은 결국 어느 순간 자기 존재를 위해
운동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전교조는 지금 교육운동의 한 뗏목이 되어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전교조는 교육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그래서 대개의 양심적인 교사들은 전교조에 기대는 것 이상의 교육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정작 이 조직은 자기 존립에 더 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 말입니다. 결국 color=#993366>전교조는 모든 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틀로 ‘교육 공공성’을 설정했지만, 실제 이것은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결과한다는 김진경 선생님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 빙자해서 교장하고 월급 타먹는
운동’으로.
4.
선생님. 교육운동의 경험이 일천한 제가 운동조직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가난’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 정신이 가장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가장 아이다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이후로부터 아이다움을 잃었습니다. color=#993366>교육운동은 ‘힘’은 없었으되 열정과 사랑만으로 존재했던 시절 가장 강력했고, 그 ‘힘’을 갖춘 지금 가장
무기력합니다.
아이들은 왜 변했는가. 학교는 왜 붕괴되어 가는가. 왜 교육운동진영은 방황하고
있는가. 저는 결국 이 모든 현실을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 환경의 변화의 산물로 여깁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김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디지털
문화의 확산으로) ‘이성의 의지’가 약해지고 ‘몸의 의지’가 강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경제적인 풍요가 낳은 정신의 타락을 흡수한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사유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를
가능케하는 ‘결핍’의 요소가 덜해졌기 때문에 그러할 뿐, 아이들은 지금도 스스로 결핍을 느끼는 요소-우정,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맹렬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낍니다)
전교조의 성장은 물론 그간 치열했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단체교섭 등을 통한 교사 집단의 물질적 환경 개선이 더 크게 작용했고,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이 정치적
상부구조의 개선을 추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경제 성장 자체가 한계 상황에 부딪쳐 있습니다.
그리고 ‘빈곤’이 우리 교육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즉 ‘빈곤’을 ‘가난’으로 풀어가야
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김진경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육 이전에 삶이
붕괴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뚜렷한 경향에 대해 집중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육>이나 매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대안학교나, 혹은 매우 합리적인 질서가 정착된 공교육 속의 학교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안 학교는 100억원이나 되는 자금과 비판적인 교양인 양성이라는 이념까지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비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비교를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미학적
고려라고는 전혀 없는 낡은 건물에서부터, 속물적인 교육관, 비평준화 지역의 맹렬한 경쟁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감옥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청춘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이 학교에 대해 회의를 느낄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적 성장’을 위시하여 개인 단위의 ‘성장’ 개념에 대해 갈수록
회의하게 됩니다. 교사는 다만 ‘우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생산적인 담론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전교조를 위시한 교육운동 진영이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라는 고추상적인 담론, ‘교육공공성’이라는 현재로서는 중산층의 가치에 기울어진 논리보다는 그저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현실을 부여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가난에 대한 성찰, ‘빈곤’을 ‘가난’으로 보듬어안는
교육, 중산층의 자기 한계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연대했을 때 우리 교육운동이 그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복선 선생님이 대담 가운데서, 그리고 ‘하자작업장’ 소개 등을 통해 이야기하는
탈근대적 교육관에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부 중산층의 교육관을 실현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육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어떤 연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color=#993366>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5.
선생님. 글을 써 놓고
보니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제 스스로 막연한 느낌으로만 가두어두었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펼쳐놓은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펼쳐놓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들의 대담에서 던진 이야기들이 실마리를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우리 교육이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즉 전교조 결성 초기의 선한 열기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 시절 제가 보낸 고교 3년을 회상하는 것은 참으로 심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몇몇 젊은 선생님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나중에 여쭈어보았더니 그 무렵이 교협에서 전교조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color=#993366>생전 영어 수업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거의 않던 분께서 흑판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쓰고 고요히 우리들에게
이 시의 속뜻을 물으셨을 때, 아이들을 교단 앞으로 불러내서 수학 문제를 못 풀면 엄격하게 체벌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날 수업시간에 1970년대와
전태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우리 학교에서 평교사 협의회의 핵심으로 소문난 어느 선생님이 빈 수업 시간 교정 스탠드에서 골똘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그 3년의 모든 암울한 기억에 값할 만큼 소중한 가르침으로 남았습니다. 그 시절 그분들은 아무 힘도
없었고, 학교는 말할 수 없이 억압적이었으며,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넘어서는 귀한 배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과 ‘결핍’, '힘없음'이 빚은 진실한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힘’과 ‘시스템’이,
혹은 탈근대적인 담론으로 정연하게 완비된 어떤 틀도 결코 좋은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의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까마득한 선배 선생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겸연쩍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들의 생각의 핵심을 잘못 짚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목말라했던 사람은 아마 저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고민이 우리 교육의 장에서 한 의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겁도 없이’ 이 무모한 글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 제게 던진 소중한 성찰을 내내 간직하겠습니다. 언제나 몇 발 앞선 자리에서 우리 교육의 길을 열어젖히고자 애태우시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두 분 선생님들께 반가움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이계삼 선생님이 월간 <우리교육> 4월호에 쓴 글입니다. 전교조 운동과 교육운동 전반에 관해
생각해오던 것을 쓴 것인데, target=_blank>다음카페 나락한알에 있는
것을 퍼왔습니다.
지난 3월 18일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관악위원회 당원 교육토론에서 발제를 해주신 이철호 선생님이 교육에
있어서 빈곤과 양극화, 불평등을 강조하시며, 이에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나서 옮겨왔습니다. 이계삼 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부분
공감합니다. 물론 이게 옳다고 말하기보다는 한번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계삼님은 교육 공공성을 빈곤과 대립시키고 있는데, 저는 교육공공성이 이 땅의 빈곤 및
불평등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교육공공성이라는 것이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고, 또한 저보다는 교육현장에 계신 분이 더 잘 알지 모르겠지만요.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입니다.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입니다.
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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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교육’
이계삼(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1.
김진경 박복선 선생님께
<우리교육> 2월호에 실린 두 분의 대담을 읽고 제법
오랫동안 머뭇거리다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경남 밀양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두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대학 시절부터
저는 두 분의 성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1학년 무렵 두 분이 함께 엮어낸 <꽃이 사람보다 아름다울
때>라는 산문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접했던 기억이 거의 없던 제게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산문’이라는 부제가 너무나 신선했거든요. 그 책에 실린 글들도 참 좋았고, 그래서 그 책을 여러 권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저는 박복선 선생님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선생님일 거라 혼자 상상하기도 했지요). 또 이런 기억도 있네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과
학생회실에서 빈둥거리던 저는 선배들이 기타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곁에서 따라부르곤 했는데, 김진경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벗이여, 어서 오게나 움푹 패인 수갑 자욱 그대로’ 하는 부분의 그 아름다운 선율과
서늘한 서정이 얼마나 좋던지요. 군대 다녀와서부터는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교육>은 도서관 잡지실에서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앞머리에 실린 편집장 박복선 선생님의 짧은 에세이를 참 좋아해서 우선 그것부터 먼저 펼쳐 읽기도 했어요.
전교조, 해맑은 웃음을 위하여 -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도, 그리고 이 글을 서신 형식으로 쓰려고
맘먹은 것도 그 대담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새삼스러운 반가움 때문입니다. 교직에 들어 조금씩 경력을 쌓아갈수록 커져만 가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무언가, 우리 교육이 처한 이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제가 마음으로 기대고 또 삶의
사표로 모시는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다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가능성에만 최선을 다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그분들 또한 이
상황에 대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의 대담 기사를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그 신랄함과
날카로움에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기사를 두 번째 읽었을 때 저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이른바 ‘밀양
고교생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용돌이를 현장에서 겪은 뒤끝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익히 보셨을 테지만, 근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이
사회는 밀양의 고등학교들과 지역 사회와 그 속의 ‘패악한 아이들’을 실컷 두들겨 팼습니다. ‘맞을 땐 맞더라도, 토론 좀 하자’는 내 속의
열망에 대해선 ‘잠자코 맞고 있어!’라고 윽박지르더니, 분이 좀 풀릴 무렵에는 총총히 다른 곳으로 떠나가더군요. 때린 자나 맞은 자나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커다란 상흔만 남긴 실로 기묘한 한판 소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월, 학교는 언제나처럼 다시 문을
열었고, 저는 ‘비평준화지역 2등그룹에 속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평반(우수반 아닌)’이라는 긴 꼬리표가 달린 학급의 담임으로, 도서관/학교신문
담당자로, 일주일 도합 스물여섯(보충수업, 야간 특별수업 포함) 시간의 수업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오락가락합니다.
2.
선생님, 오늘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야간 자율 학습을 감독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과 차례로 면담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눈 열명 중 세명이 편부/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내신 성적 50~60%대에 속하는, 그래도 성적향상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어 노동하는 부모들의
‘고래심줄’같은 돈으로 심야 학원까지 다니지만 모의고사를 치르면 절반을 채 맞추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수시모집으로 부산 경남권의 사립대학에
근근이 입학할, 그래도 졸업하고 10년쯤 뒤에는 파출소 순경으로, 포크레인 기사로, 국밥집 젊은 사장으로 스승의 날 꽃다발을 들고 옛 담임을
찾아오기도 하는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을 하나 둘 번호 순으로 복도로 불러내 공부 방법을 조언하고, 신상의 변화를 물으며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은 수줍어 말이 없습니다. 혼자만의 이야기끝에 녀석들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함에 손등에다 제 손을 포개어도 봅니다. 이 아이들 중 또 얼마는, 주로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 테지만, 가난과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는 결국 ‘즐기고 저지르는’ 어떤 삶의 길에 접어들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가 근무하는 이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 안에도
남김없이 아로새겨진 이 세상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저는 아득해집니다. 학교와 세상의 담장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려서 우리는 ‘학교’ 아닌 ‘세상’
속에서 근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 안에는 이른바 ‘교실 붕괴’라는 교육적 불가능이, 입시라는
꼭지점을 향한 가없는 질주가, 천박한 중산층 의식에 깊이 물든 교사 집단의 안일과 무기력이, 초고속 성장의 단물을 흠뻑 빨아들인 소비문화의
광풍이, 풍요와 빈곤, 이 둘로 딱 쪼개진 한국의 경제가, 양심과 도덕을 제멋대로 조롱하는 타락한 한국 사회가 모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더니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굉음을 내며 분출합니다. 가까이는 작년 연말의 대규모 수능 부정행위 사건과 우리 지역 아이들의 성폭행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만성질환자가 되어 잠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도 어느새 제 자리로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거기 있고 성장기 아이들이 12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다가 스무살이 되어
빠져나오는 것만이 분명할 따름, 이제 우리 교육의 장에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3.
선생님. 최시한 선생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겠지요. 저도 그 소설의 주인공 선재처럼 전교조가 결성되던
1989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해직된 선생님이 나오진 않았지만, 한동안 온 학교를 팽팽하게 감돌던 그 긴장된
공기와, 몇몇 젊은 선생님들의 긴장된 결연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사회의식이란 전혀 없는 촌무지랭이였지만, 저는 그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선배들이 저희들을 ‘전교조 세대’라고 불러주더군요. 눈물이 흔한 편이기도
하지만, 저는 학교 민주광장에서 전교조 결성 전후를 기록한 사진전을 둘러볼 때마다, 거리 집회 와중에 대오 한편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뛰어나오는
해직교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가르치는 것이 싸우는 것이라면,
싸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이리라’던 백무산 시인의 싯구절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선하고 약한
자들의 번민과 그것을 뚫고 나온 용기는 늘 보기 애처로웠습니다만 그것으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교조 교사! 나도 저런 존재가
되리라, 마음 속 깊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도종환 선생님의 시가 있었습니다.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 햇살이 교실에도 가득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것’. 돌이켜보면, 전교조 선생님들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은 20대 초반의 제 위태로운 자의식을 지탱해준 최선의 도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또한
전교조 교사로 살아갑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밀양지회에서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선생님들은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또한 정의롭습니다. 올해 초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내내 발을 동동구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던 것에서 보듯, 전교조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순수한 조직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늘 이런 질문에 시달립니다. 과연, color=#993366>‘지난 16년간 전교조는 아이들의 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혹은, ‘전교조는 지난 16년간
이 땅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크기를 얼마만큼 줄여주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자명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전교조는 7만의 조합원에 전임?상근 활동가들의 인건비로만 연 50억원을 지출하는, 시민사회의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었지만, 교실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갑니다. 두 분 선생님이 대담에서 거듭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 교육운동은 지난 십수년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만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그 방황의 뚜렷한 증거는 작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거에서
대립했던 주장은 평범하게 요약하자면 전교조를 ‘아래로부터 복원하자’는 입장과 ‘강력한 투쟁을 통해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color=#993366>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주장들이 모두 ‘교실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 정작 ‘교실 안’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입장은 제겐 한 사물의 다른 두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전교조
복원’을 이야기했고 방법론의 차이를 지나서 결국 같은 결론-교육공공성 수호-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전교조 조직 복원을 통해
교육공공성을 둘러싼 참호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때, 이것이 ‘교실 안 아이들’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때 어느 책에서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아시겠지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곳은 거친 땅이고, 반대편은 좋은 땅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는 뗏목이 너무나 소중한지라 강을 건너 산길을 가면서도 뗏목을 이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뗏목을
이고 가지요?”라고.
저는 이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 바로 지금 전교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교조 운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커다란 덩치의 조합 대중조직 ‘전교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전교조는
아이들의 변화를 교육적 성과로 이어가는 일보다는 스스로의 존립과 유지에 더 큰 동력을 쏟아부어야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런 이야기겠지요. 전교조는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사랑에 기초한
조직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힘과 싸우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조직(시스템)에 자신의 교육적 열정과 사랑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면이 없는 물질이므로, 물질은 자신의 운동법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전교조가 구축한 교육운동 시스템은 그 속에 담긴 교사들의
교육적 양심, 사랑과 뒤섞여 존재하지만, 물질이 정신을 밀어내는 인간사회의 법칙 속에서 시스템은 결국 어느 순간 자기 존재를 위해
운동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전교조는 지금 교육운동의 한 뗏목이 되어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전교조는 교육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그래서 대개의 양심적인 교사들은 전교조에 기대는 것 이상의 교육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정작 이 조직은 자기 존립에 더 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 말입니다. 결국 color=#993366>전교조는 모든 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틀로 ‘교육 공공성’을 설정했지만, 실제 이것은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결과한다는 김진경 선생님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 빙자해서 교장하고 월급 타먹는
운동’으로.
4.
선생님. 교육운동의 경험이 일천한 제가 운동조직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가난’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 정신이 가장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가장 아이다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이후로부터 아이다움을 잃었습니다. color=#993366>교육운동은 ‘힘’은 없었으되 열정과 사랑만으로 존재했던 시절 가장 강력했고, 그 ‘힘’을 갖춘 지금 가장
무기력합니다.
아이들은 왜 변했는가. 학교는 왜 붕괴되어 가는가. 왜 교육운동진영은 방황하고
있는가. 저는 결국 이 모든 현실을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 환경의 변화의 산물로 여깁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김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디지털
문화의 확산으로) ‘이성의 의지’가 약해지고 ‘몸의 의지’가 강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경제적인 풍요가 낳은 정신의 타락을 흡수한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사유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를
가능케하는 ‘결핍’의 요소가 덜해졌기 때문에 그러할 뿐, 아이들은 지금도 스스로 결핍을 느끼는 요소-우정,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맹렬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낍니다)
전교조의 성장은 물론 그간 치열했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단체교섭 등을 통한 교사 집단의 물질적 환경 개선이 더 크게 작용했고,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이 정치적
상부구조의 개선을 추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경제 성장 자체가 한계 상황에 부딪쳐 있습니다.
그리고 ‘빈곤’이 우리 교육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즉 ‘빈곤’을 ‘가난’으로 풀어가야
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김진경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육 이전에 삶이
붕괴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뚜렷한 경향에 대해 집중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육>이나 매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대안학교나, 혹은 매우 합리적인 질서가 정착된 공교육 속의 학교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안 학교는 100억원이나 되는 자금과 비판적인 교양인 양성이라는 이념까지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비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비교를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미학적
고려라고는 전혀 없는 낡은 건물에서부터, 속물적인 교육관, 비평준화 지역의 맹렬한 경쟁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감옥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청춘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이 학교에 대해 회의를 느낄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적 성장’을 위시하여 개인 단위의 ‘성장’ 개념에 대해 갈수록
회의하게 됩니다. 교사는 다만 ‘우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생산적인 담론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전교조를 위시한 교육운동 진영이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라는 고추상적인 담론, ‘교육공공성’이라는 현재로서는 중산층의 가치에 기울어진 논리보다는 그저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현실을 부여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가난에 대한 성찰, ‘빈곤’을 ‘가난’으로 보듬어안는
교육, 중산층의 자기 한계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연대했을 때 우리 교육운동이 그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복선 선생님이 대담 가운데서, 그리고 ‘하자작업장’ 소개 등을 통해 이야기하는
탈근대적 교육관에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부 중산층의 교육관을 실현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육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어떤 연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color=#993366>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5.
선생님. 글을 써 놓고
보니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제 스스로 막연한 느낌으로만 가두어두었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펼쳐놓은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펼쳐놓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들의 대담에서 던진 이야기들이 실마리를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우리 교육이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즉 전교조 결성 초기의 선한 열기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 시절 제가 보낸 고교 3년을 회상하는 것은 참으로 심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몇몇 젊은 선생님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나중에 여쭈어보았더니 그 무렵이 교협에서 전교조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color=#993366>생전 영어 수업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거의 않던 분께서 흑판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쓰고 고요히 우리들에게
이 시의 속뜻을 물으셨을 때, 아이들을 교단 앞으로 불러내서 수학 문제를 못 풀면 엄격하게 체벌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날 수업시간에 1970년대와
전태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우리 학교에서 평교사 협의회의 핵심으로 소문난 어느 선생님이 빈 수업 시간 교정 스탠드에서 골똘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그 3년의 모든 암울한 기억에 값할 만큼 소중한 가르침으로 남았습니다. 그 시절 그분들은 아무 힘도
없었고, 학교는 말할 수 없이 억압적이었으며,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넘어서는 귀한 배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과 ‘결핍’, '힘없음'이 빚은 진실한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힘’과 ‘시스템’이,
혹은 탈근대적인 담론으로 정연하게 완비된 어떤 틀도 결코 좋은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의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까마득한 선배 선생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겸연쩍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들의 생각의 핵심을 잘못 짚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목말라했던 사람은 아마 저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고민이 우리 교육의 장에서 한 의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겁도 없이’ 이 무모한 글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 제게 던진 소중한 성찰을 내내 간직하겠습니다. 언제나 몇 발 앞선 자리에서 우리 교육의 길을 열어젖히고자 애태우시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두 분 선생님들께 반가움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웹진인 사람소리 50호에 머릿글로 실린 글이 서상덕님의 글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오창익님의 시민운동에 대한 쓴소리도 있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실천시민연대가 어떻게 분화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연대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인권운동에 있어서는 인권운동단체들 사이에 연대가 잘 이뤄지고 있으며, 또한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지속가능'한지, 그렇게 지속가능하면서도 운동성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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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oad='setTimeout("resizeImage(2865450)",200)' align=left>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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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SIZE: 9pt"> ‘지속가능한
발전(개발)’이란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한창 운동의 다양한 조류에 민감하던 대학생시절이었다. 인권운동을 얘기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거론하는 것은 근래 들어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거닐 삶의 지형을 떠올리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살려보면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들과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새삼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예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찌됐든 지금껏
삶의 뿌리이자 전부라고 생각하며 이어온 이 운동이 ‘지속가능’할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자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물음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운동이랍시고 해온 것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놓여 있다. 이른바 소비자운동이니 무슨 권리운동이니 하는 ‘운동’이
팔리고(?) ‘운동권’이었던 게 ‘돈’이 되는 상전벽해의 시대를 살다보니 갖게 되는 혼란도 이런 생각에 일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떠올려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닌 시기, 운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삶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지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이들 사이에는 ‘기분좋은’ 비장미 같은 게 흘렀고 웬만한 허물은 서로 덮어줄 줄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 지금, 비장미는 둘째치고 운동이 운동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비애가 서리는 것은 괜한
기우일까.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었으니 축하할 일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상품으로 내어놓기까지 한다는데 있다. 좀더 비싸게 팔리기 위해. 그러나 본질적이고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한 ‘상품화
과정’에서 드러난다. 더 잘 팔리는 상품이 되려다 보니 내용보다 포장이 우선되기도 하고 ‘경쟁’이 도입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를 닮아 있다.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운동’은 아예 배제하든지 철저히 억눌러야
하는 자본주의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 인권운동가의 어린 아들은 장래 꿈이 제 아버지를 닮은
‘인권운동가’라고 한다. 또 다른 인권 단체의 동지는 그런 아이의 아버지를 꼼수나 부리는 이라고 폄훼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과연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지 되묻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학생시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던 이런 류의 구호도 ‘과연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는
자괴감으로 바뀌는 요즘이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우리가 해오고 있는 운동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과장일까.
style="FONT-SIZE: 9pt">
style="FONT-SIZE: 9pt"> 지금의 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을 최소한 우리가 물려받은 수준’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자본 위에 눌러 앉아(그럴 수도 없겠지만) 그 달콤한 유혹을 향유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이 드리우는 그늘
속으로 더 깊이 나아갈 것인지.
사회주의자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과 자유주의자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
10여 년간 지인(知人)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두 사람의 대담은 정치적 민주화는 확장됐지만 빈부 격차 등 사회ㆍ경제적 민주화는 오히려 축소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 연대'라는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답을 찾는 것으로 모아졌다.
앞서 두 사람은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 사회는 각종 집단주의가 독재정권에 의해 정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는 과정을 거쳐, 그 결과 '집단 속에 숨어있는 이기주의자'들을 양산했다고 입을 모았다.
외부로부터 이식된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재벌, 학벌, 족벌, 파벌 등 집단에 기대 있거나 집단에 숨어 있는 '벌(閥)'을 해체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사회 연대'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이번 4월 총선을 통해 의회 권력이 보수 우익 세력에서 자유주의 정당이라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으로 넘어간 것에 일정 정도 의미를 부여했다. 단 열린우리당이 진정한 자유주의 세력이라면 '벌'을 타파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특히 이들은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지금이야말로 노무현 정부가 개혁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는데, 정작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개혁에 나서는 것에 주저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두 사람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개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시간 동안 진행됐던 두 사람의 대담 뒷 부분에서는 언론 개혁, 교육 개혁 등 구체적인 개혁 과제와 관련된 얘기가 주로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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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 |
| 고종석, <엘리아의 제야> (문학과지성사 펴냄) ⓒ프레시안 | |
강양구,전홍기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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