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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의 중견쯤 되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요즘 애들은 자기 밖에 몰라' '요즘 애들은 단체생활이란 걸 몰라' 따위의 이야기에 대해서, 삶의 양식이 바뀌어 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정도로만 생각 해 왔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자기 계발'에 매몰되는 것은 안타깝다는 정도가 내가 가졌던 생각이었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반올림해서 창립 40년이 되어가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다. 130여명의 직원이 있고, 50여명의 비정규직과, 150여명의 위촉직을 두고 있다. 나는 바로 그 위촉직이고, 위촉직은 비정규직조차도 되지 않는, 사업단위로 계약하는 알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학사출신의 행정직이지만, 석사 나와서 연구 업무를 맡는 사람들도, 나와 똑 같은 대우에 단 월 20만원을 더 받을 뿐이다. 9월 1일, 입사한지 3개월 이내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입 직원 직무 연수에서 간단히 업무과정과 회계, 그리고 조직등에 대한 교육 시간이 끝나고 인사와 복무 규정 등의 시간. 사무국의 총무 인사실에서 나온 연수 담당자는 제발 퇴사할때 어느 정도의 시간을 주고, 서로간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생활하면 별 문제 없으리라 이야기 했다.마지막에 위촉직 몇 명이 질문을 했다. '야근을 자주 하게 되는데, 연장근무에 대한 1.5배 수당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야근 수당은 왜 나오지 않습니까?' 연수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정감사에서 허용된 직원과 비정규직의 수가 있고, 그에 대한 급여만이 지불되며, 이들은 연봉제로 계약하므로 연장근무 수당을 받지 않습니다. 위촉직의 급여는 연구사업비에서 지급하며 이 역시 인건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더 지급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도 정말 안타깝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또한 생산직도 아니고, 야근과 생산성에 대한 관계를 명확하게 할수 없기 때문에 야근 수당을 지급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또 한사람이 질문했다. '야근수당은 그렇다 하더라도, 야근하게 될 경우 저녁식사비조차 나오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공무원들도 연장근무하면 수당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담당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저희도 저녁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에 책정된 예산이 없고, 저도 저희 부서 직원들 야근시킬 때 저녁을 사주고 싶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부서 담당자가 사비로 지출하기는 부담이 되는것이 사실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질문했다. '일하면서 정규직 전환 등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까?' 담당자는 대답했다. '비정규직 관련 법에 의해 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가, 실제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보다는 비정규직을 2년 안에 해고하는 원인이 되었고, 저희도 이 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꾸준히 해 왔습니다. 그래서 위촉직은 사업단위로 계약을 하는것으로 조금 형편이 나아진 상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바로 법과 현실의 괴리죠.'
이런 질의응답때문에 점심시간에 조금 늦었다. 같이 점심 먹자며 나를 기다려주던 같은 부서 사람들이 왜 늦었냐기에, 이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여기서 가장 오래, 2년 넘게 일한 위촉직 두명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애들이 아직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전혀 모르나보네' 또 한사람이 받는다. '난 여기서 2년 넘게 일했는데 1년이상 고용이 지속 된 적이 없어요. 1년 넘게 일하면 연차도 줘아하고 퇴직금도 줘야하고 그렇거든. 그래서 1월 1일부터 12월 10일까지 계약을 해요. 그리고 나머지 20일은 일용직으로 고용을 해. 내 이력서 한번 보면 진짜 엉망이에요. 뭐가 꾸준히 이어져있는게 없어. 난 계속 같은 업무를 하고 있는데 고용 계약만 바뀌는거지.' 그들은 2년이 넘게, 연구며 사업 관리며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는데, 이제 들어온 나와 똑 같은 월 정액을 받는다. 석사출신인 한 사람은 20만원을 더해서. 한명이 덧붙인다. '그거 노동부에 뭐 얘기하면 퇴직금 이런거 되긴 된대요. 내가 일을 계속한 자료는 있으니까. 나갈때 그걸로 노동부에 진정서 넣으면 주긴 준다더라고. 문제 되긴 싫으니까 조용히 먹고 나가라 이거지.'
좋은 근무환경을 원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줄도 알고 있었다. 만족스럽진 않아도, 내심, 내 양심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패배감이 심한 줄은 몰랐다. 이곳의 '위촉직'들이 생각하는 미래라고는, 형편이 되면 유학 가는 것, 그게 아니라면 더 나은데 취직하는 것. 아르바이트니 뭐니 해서 두달 정도 인연을 맺은 이 곳에서, 그 외에 다른 비전을 생각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돈 없으면 쓰지 마라- 이게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면, 돈 없으면 연구 못한다고 배째고, 돈 없으면 사람 못쓰니 일 못한다고 요구하는것도 자본주의의 원칙 아닐까.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소위 조교들도 이런 처우를 받으면서, 비정규직으로, 2년이 넘기 전에 다른 먹고 살 길을 찾으며 살아간다.
공동체 따윈 없다. 부서 사람들은 모두 친하고, 같은 사무실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위촉직' 이라 편하긴 하지만 아무도 이곳에서의 미래 따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좌파든 우파든 대학교수든 박사든 연구원이든, 자기 아래의 대학원생이나 연구 조원들이 이런 처우를 받고 일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거다. 아무도 제대로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거다. 회사 중견 관리자들은 물론이고. 그러면서 요즘 애들은 공동체 생활을 모른다고 탓하고, 학원이니 뭐니 자기 챙기느라 같이 술 한잔 하는 시간도 아까워 한다고 불평 한다. 그리고 조금 진보적인 사람들이라면, '요즘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한마디를 더 붙이고. 사업비에서 밥 몇 번 더 사주고, 혹은 사업 좀 더 따오고, 그걸로 고마워하길 바라고.
자기 현실에서 무력함을 느낄때, 사람은 사회에서도 무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제 직장에서 자신의 처우에 대해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정치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낼 리가 없다. 내고 싶을 리가 없다.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진보적인 '말'을 하는 교수들에게 정말로 물어보고 싶다. 연구 보고서와 논문만 쓰면 되는거냐고. 어쩔거냐고.
이런저런 할 말은 많은데, 솔직히 마음이 답답하고 정리가 안되어서 각설하고, 이게 아르바이트인지 비정규직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분간 취직했습니다. 별 일이 다 있군요. 급여도 적고, 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승진하거나 급여가 올라가거나 하는 등의 미래도 없고, 오직 칼퇴근 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각종 기안과 지출결의서에 치여 살아야 하는 행정직으로, 전임자와 인수인계를 위해 결재라인을 따라 쭉 인사를 다니는데, 다들 전임자에게 어디든 여기보다 나으니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을 보니 이거 이거 난감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나에겐 어디든 지금보단 나으니 스스로 축하하는 수 밖에- 라고 생각 하며 9월 1일부로 12월 31일까지의 계약서를 씁니다. 전임자는 정말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남자였는데, 그런 방면으로는 참담하리만치 무능해서-아, 물론 다른 방면으로도 그렇지만- 걱정이 앞섭니다. 실수령액 120정도, 밥사먹고 차비쓰면 한 30정도, 20정도는 약값과 책값등의 용돈, 나머지 70은 생계비로 상납하는 것으로 잠정 결정 되었습니다. 가계에 작은 보탬이 되는 것은 다행이고, 그나마 유일하게 집에 돈 들어올 일이 생긴 것도 다행이고, 게다가 3년동안 아무 일도 못 한채 논 주제에 뭐 가릴 게 없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고민이 앞서는 걸 보면서, 난 정말 되먹지 못했구나,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는데, 하고 스스로 비웃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 하는 나를 또 한번 비웃지요. 아, 별꼴이야 정말. 아무튼, 당분간 갖은 욕을 먹으며 지낼 듯 하고, 그래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있으니 어쩌면 조금 더 자주 글을 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지금보다도 더 글을 안쓰는 상태란 불가능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에, 그렇습니다. 솔직히 무서워요. 이런 비웃음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 잘못으로 또 모든 걸 망치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과연 앞으로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런데 지킨다면 뭘 지켜야 하는 걸까. 이 일은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 뭘 해야할까. 뭘 할수 있을까. 따위의 소승적 차원에서 이명박은 언제쯤 입을 꿰멜까. 전쟁나면 어떡하지. 등등의 대승적 범위까지. 예, 어떻게 되겠지요. 떠밀려서든 혹은 헤쳐나가든, 원하든 원치 않든, 이렇게 또 흘러 갑니다. 그게 기쁜건지 슬픈건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 모르든 말든, '모든 것은 단지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 위안인지 절망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요.
아, 그리고 혹시, 최근 한 일주일간 홈페이지 접속이 안 되는 상황을 보신 분이 있다면, 관심에 감사드리며, 돈 못내서 호스팅이 잠시 중지되었었습니다-_- 생일선물로 손군에게 일년치 호스팅비를 강탈하였으니 걱정은 마시되, 혹시 후원할 계획이 있다면 79413024....................미안합니다-_-
어쩌다 이곳을 들러 드문드문 올라오는 나의 안부를 훔쳐보다, 사고소식에 놀랄 나의 오랜 친구들에게-
별일 없이 삽니다. 별 다른 걱정은 많지만. 괜찮습니다.
사고 관련 전화를 두번쯤 받았더니, 반갑긴 한데, 혹시나 해서 올려둡니다-_-;;
이십대 후반. 친구나 선후배들이 결혼하는 것도 이제 더이상 놀랄 일이 아니고, 어쩌면 그게 내 일이 될지도 모르는 때가 되었다. 가끔 그들을 만나 웃고 이야기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나는 때때로 두려워진다. 5년 쯤 뒤, 우리는 아이의 영어유치원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되지는 않을까, 10년 쯤 뒤, 특목고와 어학연수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 중 누군가는 '기러기 아빠' 가 되는 것은 아닐까.
대학시절, 우리는 사회의 진보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용돈 벌이를 위한 과외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 해 본적은 없었다. 우리는 변화와 투쟁을 외쳤지만 그럭저럭 어디가서 부끄럽지 않은 학력을 가진 자신의 사회적 자본에 대해서 고민 해 본 적은 없었다. 고학년이 되고, 졸업이 가까워 오면, '운동단체'에 남아 활동을 지속하는 이들에게 약간의 미안함과 부채감을 가지고, 토익을 보고 취업을 준비했다. 우리는 그다지 다른 삶을 살지는 못했다.
물론 확실히 나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나는 과외를 하는 대신 집에서 용돈을 받았고, 활동가가 되지도, 직장인이 되지도 않은 채 집에 앉아있는 백수 일 뿐이니까. 구차함이 싫어서, 행동할 용기는 내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가까운 타인들에게 업혀 왔을 뿐이니까.
또한 물론, 우리가 어떤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 무슨 꼬뮌이라도 만들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우리가 비판하는 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과외를 하거나, 취업을 해서 살아가는 친구들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며 비난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확실히 우리는 무언가를 지키려고 했다. 혹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아니, 최대한 양보해서, 뭔가 지켜야 할 게 있다고 말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무언가를 지켜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가야 할 지,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이제 곧, 하나 둘씩, 아이들을 키우게 된다.
내 취업 문제, 내 밥벌이 문제에서 그랬듯이, 고민 없이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사회에 편입했던 것 처럼, 내 자식 문제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지금처럼, 내키진 않지만, 어쩔수 없다는 변명과,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말을 하며 아이들을 학원으로 입시로 몰아 넣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우리는 그 최소한의 고민도 안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88만원 받거나, 겨우 취업에 성공해서 이제 신입사원이 되거나 경력이 조금 쌓인, 우리, 20대, 30대 초반 말이다. 이제 아이를 곧 갖게 될.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꿈꾸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이제 우리 자식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386, 이제는 486은 거의가 동의하다시피, 아이들을 학원으로 보냈다. 사교육 시장에서 크게 배를 불리기도 했고, 아이들을 어떻게 입시를 통해 성공시킬 지, 그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선보였다. 이제 아이들이 초등학생 쯤 되는, 397이라고 해야할까,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대체로 그 방법을 따라가거나, 일부는 그 이전 세대의 과열된 사교육과, 몰인정한 입시제도에 반대하며,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주입식 영어교육이 아닌 '엄마표 영어' '영어 동화책 읽기' 류의 새로운 공부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뭐냐면, 소위 말하는 '엄마표 영어교육'이 담보로 하는 것은, 엄마의 학력, 엄마의 여유라는 것이다. 대안학교에 보낸다는 것이, 일종의 부모의 금전적 여유를 지불하고 아이의 정서적 안정을 사는 거래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아이의 교육' '내 아이의 입시' '내 아이의 성공' 이라는 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5년 뒤, 10년 뒤, 내 자식 문제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 하고 있을까. 나? 나는 아이를 갖지 않는 것으로 여전히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아이들 학원이야기를 들으며.
한 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을쯤에 있을 프로젝트를 위한 일종의 pilot 조사인데, 원랜 일 주일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작업량이 너무 많아선지, 내가 일을 너무 못해선지, 주 단위로 3번의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고, 따로 일주일 치 재택작업도 했다. 매일 출근하는 건 아니었고, 종종 도서관에 자료 조사 하러도 가고, 집에서 일을 한 적도 있어서 적당히 게으름도 부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딴 짓도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 했다. 비정규직이니까. 잘 해야 또 다음 주 계약서를 쓸 수 있고, 이 프로젝트가 진행 되었을때 또 일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항시적 실업상태의 백수가 항시적 고용 불안정 상태에 놓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선을 다해 쥐어짜는 일 밖엔 없었다. 비정규직에겐 내일이란 건 없으니까. 내 경우야 일이 확정되지 않은 조금 특수한 경우였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이란 건 참 더러운 제도라고 느꼈다. 날 마음에 들어 할 지, 내게 원하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 하는지. 원래 내가 소심하기 때문이겠지만, 사회생활이라곤 모르는 히키코모리의 퇴화된 사회성 때문이겠지만, 계속 주위를 살피고 또 걱정하는게 참 힘들었다. 그래도 그 동안, 이런 저런 강의니, 도서관이니 하며 책상앞에 붙어있는 연습을 해 둔 것이나, 하루 10여알의 알약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근 1년만에 일을 했다. 주5일 근무, 한 달 22일 출근하면 정확하게 88만원에서 원천징수되는 세액을 제한 금액을 받게 되고, 나는 그 보다 적게 일했으니 좀 더 적은 액수. 아르바이트에 간다고 최소한 셔츠 정도는 있어야지 하고 옷이며 몇가지를 구입하고, 주급을 받고서는 그간 꾸준히 도움받고 민폐를 끼친 수많은 사람들 중 극 소수에 해당하는-가족과 손군, 약간의 친구들에게 모자란 빚잔치를 하고, 10여만원의 교통비와 이러저러한 금액이 나가고 나니 통장의 잔고는 다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어쨌거나 돈 때문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계속 일 하기를 희망하며 기다리고 있다. 여름이다. 덥다. 교육계통의 연구원에서, 내 나이 또래의 석사 마친 연구원들과 일을 하면서, 뭐랄까 이제 딱히 희망이라거나 계획이라거나 미래라거나 하는 것이 거의, 없어졌다는 걸 느꼈다. 집중에는 도움이 되더라. 하지만 이래선 난 아무 것도 될 수 없겠지. 바쁘면 잠시 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벗어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좀 힘들다.
스무 살 땐 설레임, 세상이 예뻤다. 사랑이 쉬웠듯이 약속도 그랬다. 커피와 담배처럼 진하고 또, 독한, 젊은 밤이 지날 땐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 벌거벗은 채로 세상을 맞서도 두려움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롭던 날들, 사랑했던 시간, 그리운 내 모습이여.
서른 살은 기다림, 또 다른 시작을. 약속을 지키듯이 사랑도 그렇다. 녹스는 가슴으로 버텨내는 시간, 견디기 힘들어서
나도 몰래 눈물이 흐를 때. 다시 한 번 여기 세상을 맞서는 날 위해 기도를 해야 해. 아무것도 아닌 세상의 고민들 이제는 버릴 수 있게.
이승열, 스물 그리고 서른, 2007, <In Exchange>
4개월동안 나름대로 즐거웠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하나의 힘이 되어 주었던 강의가 끝났다. 마침 일주일짜리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어서 저녁도 못먹고 강의에 뛰어 들어가, 종강모임도 참석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말에 별 이유없이 열이 올라 터진 입술을 씹으며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부터 몇번이고 되감기 버튼을 누르며 듣고 또 들었다. 열한시 삼십분. 막차. 스무번, 그리고 일곱번, 그리고 또 다시 반쯤, 듣고 나니, '이번 정류장은 신현3리 오포마트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광명초등학교입니다.' 열두시 삼십분. 나도 몰래, 눈물이 흐르진 않았는데, 씹던 입술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내일이면 엄청나게 부어오를텐데. 아 내일 아르바이트에서 팀장이란 양반께 인사를 해야한다던데. 어쩌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폐차장에서 끝나리란 것은 사고가 나고 이틀쯤 뒤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또 이틀쯤 뒤, 수리 가능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기뻐하며, 이제 어차피 팔지도 못할테니 노환으로 자연사 할 때 까지 잘 보살펴 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또 이틀쯤 뒤, 도저히 수리 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고, 폐차장으로 차를 옮기겠다고 했다. 결국 사고가 난지 정확히 일주일만에 군포시의 한 폐차장에서 완전히 분해해서 더욱 참혹한 마티즈를 만나, 기념으로 차의 계기판을 떼오고, 폐차를 위한 서류작업을 했다. 흑 잘가. 계기판은 어쩜 그리 깨끗하던지. 아니, 앞바퀴를 기점으로 그 뒤는 어찌나 멀쩡하던지.
무릎이 아프고 목이 좀 아프고 갈비뼈가 많이 아프고- 다행히 골절은 없다고 하니 한 한달 조심하면 낫지 싶다. 다만 사고며, 늘상 고민하던 일들이며, 최근에 심해진 생활의 변화에 대한 압박, 날씨는 덥고, 돈벌어서 차를 사줘야한다는 부담감, 졸업한지 3년이 된다는 짜증 따위로 좀 힘들다.
아침부터 서둘러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썼다. 살면서 처음 쓰게 될 진술서가 교통사고 경위 진술서일 줄은 몰랐다. 경찰서 사고조사계에 비치된 견본을 보고 쓰는데, 그 시작은 이랬다. '저는 00살로 000에 살며 직업은00입니다.' 무직이라고 쓰려니 당연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0월0일0시경 본인 외 탑승자0명과 00에서 00으로 향하는 편도0차선 도로 00부근에서 약 00km/h의 속도로 S자 곡선도로를 주행하다....' 사고시점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기에, 그리고 달리 할 말이 없길래 그냥 썼다. '본인의 운전 미숙으로 우측의 전봇대와 사고차량 전면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으나 복부 충격으로 인한 통증과 당황으로 잠시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이 충돌시 소음을 들은 인근 주민이 119에 신고하여 00시00분경 응급 구조반이 도착하여 00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 내가 남자였거나, 사고 장소가 좀 다른 곳이었거나 했다면 음주나 또 다른 가능성을 의심 했을 지도 모르지만, 추리닝 차림에, 지갑만 들고 빈손으로, 술냄새도 나지 않고, 집에서 출발한지 10분만에, 골목에서 사고를 낸 사람에게 별 다른 혐의를 찾을수는 없었는지 사고 장소를 뜬 것에 대한 해명은 간단히 마무리 되었다. '...x-ray, 복부ct촬영 등의 검사 결과 큰 문제점을 찾을 수 없기에 통원치료 하기로 하고 귀가하였습니다. 귀가하던 길에 사고지점에서 차량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전화 해 보니 해당 파출소로 연결 해 주었고, 해당 파출소에서 순찰중 견인조치하였고, 관할 경찰서 조사계로 사건이 접수된 것을 안내받았으며 이후 조사계 000경장에게 연락을 받아 이후 조사에 대해 통보 받았습니다.' 로 끝나는 진술서. 당연하겠지만, '저는 앞으로 언제나 전방 주시에 태만하지 않을것이며 안전에 유의하여 운전하겠습니다' 혹은 '이번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차주와 인근 주민께 사과드리며, 본인의 치료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따위의 말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스러웠다.
경찰서 다음엔 병원에 좀 들르고,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대략 3-4주간의 진단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고, 보험회사 콜센터 직원, 보험회사 대물 손해 배상 담당자, 보험회사 대인 손해 배상 담당자와 여러차례 전화해서 경위를 설명하고, 병원에 다녀온걸 얘기하고, 설명하고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하종강씨였나, 어느 해 수배 도중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고 여름이 다 가도록 몸의 멍이 사라지지 않아 반팔을 입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최소한 몇 일은 반팔을 입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큰 멍들은 몸통에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
의외로 부모님께 별로 혼나지 않았는데, 차가 부서진 것을 보고 너무 놀라신 나머지, 안좋은 상상이라도 많이 하셨는지 다른 차나 사람 안 건드리고 너 크게 안다친걸 감사하라는 말만 계속 하셨다. 물론 뭐 여타 잔소리들도 있었지만, 그야 당연한 걸테고. 하지만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사고에 대한 억울함이 여전히 앞섰고, 그렇지만 내가 그걸 누군가에게 주장하거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므로 그냥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다리가 많이 아팠는데 억지로 밤에 서울에 갔다. 요즘 거의 유일한 삶의 낙인 강좌를 듣고 집에 돌아오는데, 명동 롯데백화점 근처에서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다가 버스에 치일뻔한 남자애 둘을 봤다. 민망해선지 둘이 장난을 치던건지 아니면 자기가 지금 무슨 상황에서 겨우 벗어났는지를 모르는건지 웃고있는 애들을 보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 역시 인간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이겠지만, 타인을 거기에 끌어들이진 말아야겠지, 따위의 쓸모없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세정거장 지나 중앙극장 앞에서 역시나 무단횡단 하다가 버스 전용차로에서 버스에 치여 피를 많이 흘리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람을 보았다.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삼일 전 나도 교통사고로 저 차에 탔었지, 라는 생각과 아스팔트에 흐른 피를 보니 기분이 참 이상해졌다. 어쩌면 난 참 다행이었던 것이겠지. 내가 많이 다치지 않은것도, 남을 다치게 하지 않은 것도. 그런데 남의 불행을 보고서야 자신의 다행을 깨닫는 나는 뭘까, 그런 생각들.
동생이 쓰던 목발을 짚고 겨우 움직여 차를 보고 왔는데 안되겠다 싶었다. 아무것도 변명 할 수 없이, 내 잘못인데 왜인지 억울하고 나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금전적인 손실도, 남의 차를 갖다 부수어버린것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도, 내 몸이 아픈 것도, 사고 낸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뭔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나, 그리고 뭐 내 차는 아니지만 일년 가까이 갖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정 주었던 첫 차를 폐차시키는 것도, 전부 화 나고 의기소침하고. 휴.
지난 주 일이 있어서 손군에게 마티즈를 잠깐 대여. 금요일 밤 건전지를 사러 편의점에 가다가 동네 산길에서 혼자 전봇대에 차 들이박고 소리에 놀라 나온 동네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어 119에 실려감. 여기저기 타박상과 찰과상, 무릎 인대에 약간 문제, 그리고 약간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복부 충격에 따른 경미한 출혈 외에는 비교적 건강. 차는 내팽개친 채 병원에 실려갔더니 순찰중인 경찰에 의해 반파된 차가 발견되어 사고 접수 들어감. 월요일에 출두조사받아야 함. 음주가능성 등을 의심하다가 병원에 실려간 등이 확인된 점, 목격자가 많은 점, 병원에서 혈액과 소변검사를 받은 점, 무엇보다 피해자가 없는 점 등을 이유로 별일 없이 넘어갈 듯. 경찰이 견인처리한 차를 아직 보러 가지 못했는데, 렉카 운전사의 말에 의하면 엔진은 물론 대시보드까지 영향이 있어서 폐차해야한다고. 아아 손군 나를 살려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 천원 내고 일주일간 자동차 보험에 들어 둔 것. 한가지 슬픈 것은 정작 차를 대여한 일은 보지도 못했다는 것. 하나 더 보다 사소한 슬픈 점이라면 사고 당일 낮에 1670원대 주유소를 발견하고 좋다 싶어서 기름을 오만원 어치나 가득 넣었다는 것. 사고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음. 오른쪽 뒷바퀴가 밀리는 느낌과 이후 잠깐의 암전. 그리고 복부 타격으로 인한 죽을것 같은 괴로움, 정신 없음,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 119의 질문 공세 등 외에 기억이 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망각 기제인가 하는 생각이 듬. 인근 병원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응급 구조반이 TA, 드라이버, 의식 양호를 외치던 생경한 느낌. 으아아악. 불쌍한 우리의 마티즈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내가 싫다 으악으악 정말 싫다 돈벌어야겠다 제기라아알알알. 이로서 나의 무사고 운전 3년 경력이 날아갔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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