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이의 거짓말-자본주의의 관건은 분배이다.
'파이의 몫을 나누기 보다 파이의 크기를 키우자' 중학생쯤 되면 교과서에서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슬로건이다. 곰곰히 생각 해 보면 정말 훌륭한 슬로건이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이 말을 듣고, 파이보다 피자가 좋은데, 따위의 농담이 분명히 나온다. 하지만 절대 다수가 절대적 빈곤에 놓였을 때, 파이가 커진다는 비유는 얼마나 현실적이고 달콤한가. 또한 자본주의:성장-사회주의/공산주의(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청소년에게 구분해서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없다. 이 이야기는 차치하기로 하고.):분배라는 공식을 주입함과 동시에,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작은 파이를 놓고 좀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런것을 일타쌍피라고 하던가. 정말 효율적인 슬로건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듣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특히 북한을 겨냥한)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개인이 각자 논을 갖고 농사짓는 논의 벼는 잘 영글었는데, 공동소유하여 경작하는 논의 벼는 엉망이라고 한다. 반면 논을 공동소유하여 경작하는 이들의 텃밭농사는 비할바 없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공산주의란 허황되고, 비효율적이며,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고, 자본주의적 '소유'와 '경쟁'을 통해 부가 증대된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구태여, 공들여, 전한다. (물론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로 공산주의를 해석한 점이지만, 이 역시 차치하기로 하고.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정의에 대해서도 패스하기로 하자.)

나는 자본주의자가 아니고, 자본주의를 벗어나고 싶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인간이다. 자본주의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 자랐고 자본주의를 배웠고 자본주의를 살고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싶지만, 감히 그 이상을 상상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지 못했다. 지금 하는 '파이'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배운 자본주의의 이야기다.

문제는 '닥치고 경제성장'을 외치는 이들의 주요 레퍼토리인 '파이를 나누기 보다 크기를 키운다'는 이 슬로건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에 완전히 위배된다. 자본주의는 '사적소유'를 전제로 한다. '소유' 하기위해서 '경쟁' 하는 것이다. 자신의 논에서 더 많은 벼를 수확하기 위해서. 즉, 내가 얼마나 더 가질것인가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동력이다. 그런데 왜, 파이에서 만큼은, 내 몫을 챙기지 말라고 하는것인가. 분배라는 것은 결국 생산물이 누구의 몫으로 돌아가는가를 결정하는 행위인데, 파이를 분배하는 것이, 다시 말해 파이를 소유하는 것이, 왜, 자본주의의 성장과 반대되는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 분배하면 성장할 수 없나? 대체 왜 분배와 성장을 대립각에 놓는 것인가. 그리고, 파이를 키운 뒤에 그것의 소유는 누가 결정하나?

기본적으로 이 주장의 파이는 하나가 아니다.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의 파이는 전체적인 파이다. 하지만 숨겨진 파이가 하나 더 있다. '파이의 분배는 미루자'에 나오는 두번째 파이는, 전체 파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미 파이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단호히 금을 그러놓은, 소수의 파이다. 내 파이를 포함한 전체의 파이를 키우자, 하지만 내 파이는 너희의 분배 대상이 아니니 넘보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멜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전체 파이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소수의 파이는 기하급수적으로 그 몫을 늘린다. 그렇기에, 경제 지표가 성장하고, 사회적 부가 증가하지만,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은 증가하지 않고, 여전히 서민경제가 어려우며, 살기가 힘든 것이다.
실제로 그들 소수의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리는 참으로 이중적이라서, 소수(자본)가 소유한 부(파이)는 시장 원리의 기본인 소유의 자유이고 이것을 침해하는것은 경제성장에 저해되며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는 시도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경제적 권리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사회적 부를 깎아먹는 행위로 해석한다. 실제로 그들의 속마음은, 나의 부를 깎아먹는 행위, 일 것이다. 기업의 시장 점유나 전체 부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이익 분배에 대해서는 철저하지만, 사회에 대한 부의 환원에 대해 이야기 하면 그들은 정색하고 말한다. '지금은 합심해서 파이를 키울 때 입니다. 우리가 분열해선 안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배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성장이 이루어지질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선성장 후분배' 라는 말로 성장과 분배를 분리한다. 더 나아가 분배는 성장을 저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임금을 인상하면 기업이 망한다, 직접세는 경기를 위축시킨다. 흔히 하는 이야기다. 세금이 늘어나거나, 임금을 인상하면, 생산비용이 증가해 순이익이 낮아지고, 결국 임금을 감소해야 하므로, 노동자들이여, 단순히 지금 월급 많이 받자고 욕심 내지 말아라,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거다, 라고 엄중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세금을 내면, 세금은 증발하나? 월급을 많이 주면 사람들은 월급통장을 통채 씹어 먹나? 세금으로 기업이나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자하여 생산의 비용을 감소하게 할 수도 있다. 세금으로 사회복지, 그러니까 개인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사회가 지불하여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면, 기업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를 줄일 수 있다. 임금 인상은 역시 가처분소득의 확대가 되고, 개인의 투자심리가 확대되어 기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소비수요가 증가하면 기업의 매출이 증가할 수 있다. 이런 자본과 재화의 흐름이 원활하게 이루어 진다면(사실상 그들이 주장하는 경제적 원리 역시 '원활하게 이루어 진다면'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반론하지 말길 바란다), 세금이나 임금을 인상하는 행위는 실제 지불의 주체가 바뀔 뿐, 부의 증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성장을 저해하는 '분배'가 될 뿐이다.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성장이란, 그들 자신의 부의 성장이고, 분배는 그들의 부를 감소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자본주의의 기본으로 돌아 가 보자. 자본주의는 '분배는 나중에 하자'고 하지 않는다. '분배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이야기한다. '파이의 분배보다 성장'이 아니고, '파이의 분배에 시장 원리 이외에 다른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 슬로건의 본심이다. 나중에 더 커진 파이를 나눠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전경제학의 대부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실제로 사회의 이익을 직접 추구했을 경우보다 더욱 유효하게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가 많다" 고 했다. 이기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의 부를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원리의 핵심이다.
이것을 '파이'로 바꾸어 말해보자. '내 몫의 파이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면 전체 파이의 크기도 커진다.' 하지만 현실은 '네 몫의 파이는 잘 모르겠고, 일단 성장'을 요구하고, 바꿔말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개인은, 분배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은, 이미 자본을 소유한 소수일 뿐이며, 나머지는 '주는대로 먹고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말장난일 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도 혹은 다른 무엇도 아니다. 그냥 '놀부 심뽀' 라고 하면 된다. 자칭 시장주의자, 자본주의자들이여, 속지 말자.

2. 그러나 다시, 파이를 키우자.
뜬금 없겠지만, 그러나 나는 지금 분배를 따지지 말고 파이를 키우자고 주장한다. 생존의 파이다. 우리 사회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보자. 등록금이 없는 대학생은 빚을 지고 자살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는 죽음으로 호소한다. 부모가 일하는 동안 방치된 아이들은 사고로 죽어가고, 철거민들은 제 집을 지키려 싸우다가 불에 타 죽고, 그 싸움에 동원된 어린 경찰도 휩쓸려 죽는다. 여든의 운동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고, 심지어 (임기를 완료한) 전직대통령도 자살한다. 아이도, 젊은이도, 중년도, 노인도, 가릴 것 없이 세상을 떠난다. 이 모든이의 죽음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모두 게을렀나? 그들이 모두 정신적 문제라도 있었나? 그들이 모두 자기관리를 잘못한 것인가?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인가? 우리는 그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나는 열심히 내 삶을 살았을 뿐, 내 책임은 아니라고 눈을 돌린다. 그러나 누군가 뉴타운으로 이득을 본다면, 누군가는 집을 잃는다. 누군가 투자에 성공하면 누군가는 잃게된다. 그것이 내 탓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집을 잃고 파산한 것을 이유로 죽음을 택하는 것을 방치한 것은 분명히 내 탓이다. 더구나 경제지표는 상승한다면서, 왜 누군가는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잃고 있는 것인가. 경제는 성장한다는데 왜 누군가는 빚만 늘어가나. 그리고, 언젠가 내 차례가 오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나. 당신, 그렇게, 잘났나.

생존 파이의 분배를 다투지 말자. 누가 다음에 죽을 것인지 뽑기로 결정하지 말자. 죽음의 파이의 몫을 이웃에게 넘기지 말자. 함께 살아갈 파이를 키우자. 이웃이 죽음을 택하기 전에, 그들의 비명을 듣자. 뉴타운 소식에 귀기울이고 주택 청약저축을 챙기기 보다 누구나 주거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집을 짓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건강보험 가입을 위해 전화를 들기 전에, 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하는 이들을 없게 하자. '입시'정책에 따라다니며 아이들을 혹사시키지 말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필요한 '교육'을 받게 하자. 대졸 20대 청년 실업률을 논하기 보다, 중등교육을 마친 성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의 일원으로 타인의 도움 없이 제 몫을 하게 하자. 요즘 젊은것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인지 돌아보고, 출산률을 이야기 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생각하자. 사업에 실패하고 투자에 망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 삶은 이어가게 하자. 소위 '복지국가'들의 국민들이 게으르다거나 생산성이 낮다고 주장하는 신문기사를 읽기 전에, 서울역의 노숙인들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 물어보자. 노동자의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라는 그럴싸한 말로 비난하기 전에, 노동이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알자. 그리고 나 역시 그 권리와 의무를 위해, 언제든 당당하게 주장하고 싸우자. 불법 시위와 법 질서를 이야기 하기 전에, 그들의 말할 권리가 보장되었는지 확인하고, 교통정체에 짜증내기 전에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 광장을 가로막고, 잔디의 훼손을 걱정하는 이들을 욕하고 냉소하기 전에, 그 광장에서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자. 국론통합과 화해와 용서를 말하기 전에, 그 상처가 아물었는지 살피자.

제발, 좀, 그만, 죽고, 죽이자.
그만 좀 하자.
2009/06/10 17:38 2009/06/10 17:38
비판적 지지이든 뭐든, 노무현을 저의 대안으로 놓아 본 적이 없어서, 노무현에게 '기대와 실망' 하는것을 전 사실 잘 이해 하지 못하겠어요. 물론 2002년에 갓 스물이라, 노무현이 당선되기 까지의 과정을 주의깊게 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2002년전에 그의 존재를 크게 느끼지도 않았고, 2002년의 대선이 나에게 해당된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랬겠지만, 희망의 상징이나 변심한 애인, 이라는 생각이 와닿지 않아요. 확실친 않지만 예전에 진중권이 그랬던 것 같은데, 저에게 노무현의 가장 큰 성과는 그의 당선이고, 거기까지가 전부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에게 그는 새 시대의 상징이겠고, 어떤 사람에게 그는 동 시대의 동지이겠고, 하지만 저에게 그는 역시 하나의 구 시대 입니다. 물론 구 시대라고 해서 다 같은건 아니지만요. 저에게 노무현은 극복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를 새 시대 혹은 동 시대로 여긴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구 시대인건, 어쩌면 제가 '구 시대'에 대해 책임 질 만한 '어른' 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그들은 책임 질 수 있는 어른이었고요. 그것이 그들의 덕택이라는 것은 압니다만, 제가 할 일은 그를 극복하는 거지 그를 내세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지금도.

아무튼, 전 그에게 정책적인 변화를 기대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인간적인 기대를 해 보았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정치인 노무현'은 실망이었지만 '인간노무현'은 좋은 사람이었다, 고 애써 분리해서 평가하는데, 제가 실망했던건 분명히 인간 노무현이었어요. 솔직히 한미FTA가 우리 사회에 미칠 여파가 지대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문제는 한미관계 이전에 우리나라 산업구조 전반에 대한 고민과, 사회적 이해와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에게 전 그런걸 기대 한 적이 없어요. 다만, 인간 노무현이, 대추초등학교를 무너트리고,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것이, 시위 도중 사망한 농민에 대해 한마디 사과를 하지 않은것이, 그게 노무현에 대한 저의 가장 큰 실망이었습니다.
'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이 과연 분리 가능한 것인가, 의 문제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 차이겠죠. 그렇지만 '인간 노무현'이 아닌 '정치인 노무현'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라고 하는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실망했는지, 냉정하게 바라보는것은 중요한 작업일테니까요. 그러니까, '정치인 노무현'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명백히 밝혀 내야합니다. 그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노무현의 잘못이 아니라 기대한 사람의 잘못이니까요.

그러나 그에게, 특히 대통령 임기 후반과 임기 후에 보냈던 근거 부족한 비난에 대해서, '조중동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려졌던 사실' 을 이야기하는건 너무 비겁한거 아닐까요? 그 부분에선 반성 할 뿐이지, 조중동이 나온다는건, 그저 구태의연한 말인것 같아요. 우리가 언제부터 조중동을 믿었다고. 조중동을 믿을만큼, 순진하지도, 무지하지도 않으니까요. 게다가, 만약, 지금, 2000년대에 2-30대이고,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와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조중동의 의도에 그대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전 그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형편이 허락하는데도 무지하거나 순진한건, 그 개인의 책임이죠. 소위 '한, 경'의 태도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지만, '한, 경' 핑계를 대는것도 부끄러운데, '조중동' 은 좀...

이명박을 몰아내자,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입장 정리를 잘 못하겠어요. 고민은 많이 드는데... 물론 제거해야 할 대상이죠. 이명박과 지내는 지난 1년 반동안, 우리의 수준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보세요. 노무현을 비판했던(비난 말고) 이들이, 이명박과 지내면서, 그래도 노무현이 나았다, 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니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될 것이다.(Beyond Good and Evil)"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는게,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올바른 일이겠죠.
그런데 그래요, 이명박은 병적-_-인 존재입니다. 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증요법도, 병소를 제거하는 수술도, 모두 필요하겠지만, 정작 환자는 세균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청결하지 못한 채, 개방된 상처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런 치료들의 결과는 항생제 내성균(이명박은 등급으로 치면 반코마이신 내성균정도-_-)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손놓고, 환자가 죽는것을 바라 보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물론, 이명박도 몰아내고, 대안도 마련하고, 사회적 환경이 개선되면 좋겠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그만큼의, 능력은 없는것 같아서요. 선차적인 과제는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그만큼의 토론이 필요한데, 그런 이야기들이 잘 되고 있는지는 전 의문입니다.

어쩌면 우린 비난하고 싶었는데 대상이 노무현이었고, 울고싶었는데 기회가 노무현이었고, 화내고 싶었는데 만만한게 이명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그 모든 비난과, 눈물과, 분노가, 부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우린 그 정도의 수준일 뿐인것 같아요. 무책임하죠.


*댓글로 달았다가, 뭐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저의 독백, 인것 같아서 새글로 고쳐 씁니다.

** 그리고, 강희남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를 읽어봅니다. 우울하군요.
2009/06/08 23:08 2009/06/08 23:08

from 백수의일상부유 2009/06/06 09:14
나는 그에게 무엇을 미안해야 하는가
나는 그에게 무엇을 고마워 해야 하는가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2004년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2005년 농민 전용철 홍덕표 2006년 포스코 하중근 2007년 한미FTA반대 허세욱

당장 생각나는 이름만 일곱인데.
나는 그에게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
선배들의 노력으로 내가 이런 글도 쓰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적으로, 지적으로, 나는 빚을 지지 않았다.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역시도 같은 피해자일 뿐일까.
그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보겠지만,
저 이름들의 죽음에는 누가 물어볼 것인가.
누구에게 물어볼것인가.
어떻게 책임을 물을것인가.
2005년 농민이 시위도중 사망하자, '사망의 원인이 된 폭력시위를 근절하겠다며' 한겨울에 물대포를 뿌려댔고
2003년 노동자들이 분신했을땐 '분신으로 주장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
난 다 기억한다.
그가 나이브한 원칙주의자었던 것을.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그는, 기존의 국가권력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맞았던 물대포와 2008년 6월에 맞았던 물대포가 같다는것을.
이 감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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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밤에 썼던 글이다. 워낙 자주 글을 쓰지 않아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_- 내 나름대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며칠간 조용히 지내고 싶었고, 무엇보다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시청과 서울역, 강남역 등의 분향소를 네번이나 지나 갈 기회가 있었지만 발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 볼 뿐 조문은 하지 못했다.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뭔가 슬퍼지는 내가. 그의 동영상 클립들을 찾아보며 감정을 되새기는 내가. 슬퍼해도 되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용산의 6명의 죽음보다, 그의 죽음에 더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나에 대해서, 불편했던 거다. 용산에 가서는 향을 피우지 못했는데, 노무현에게는 담배 한개비 불 붙여도 되는건지, 주저했다. '쿨한 척' 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간접적으로나마 5-6년간의 모습을 보아왔던 사람과, 그저 국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부당하게 목숨을 잃은 것, 으로 밖에 알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은 다를 수 밖에 없을것이다. 그러니까, 누구의 죽음이 더 억울하고, 누구의 죽음이 더 부당한 것인지를 떠나서, 살아 있을때의 모습을 봐 온 사람과, 죽음 이전에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사람과의 차이인 것이다. 죽음으로 밖에, 그들을 만나지 못한 나의 현실에 대한 죄책감은 차치하고라도. 그래서 그런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 그릇되지는 않았다, 라고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글들을 읽었다. 자살-사망-서거에 이르는 단어의 논란은, 조갑제류의 생트집(가령 그는 '김수환 병사'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은 무시하고, 의미가 있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무례라는 이유로 폄하되긴 했지만, 홍길동 대통령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홍길동각하, 라던가 홍길동어버이수령님, 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라는 직업, 더구나 5년간의 계약직 직업을 가진 이를 김철수씨, 라고 부르는 것과, 편의점 주인이 그가 고용하는 시간제 점원에게 김철수씨, 라고 부르는 것이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의 예의를 떠나,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정치적, 그러니까 역학적 변화와 파장에 대한 논의는, 물론 고인에 대한 무례이겠지만, 결론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해야 했기에,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이다-_-) 게임이론, 이라고 말 하긴 했지만 간단한 '죄수의 딜레마' 정도의 합리적 선택이론을 적용해서 정리해 놓은 글을 읽었는데, 이 '사태'의 변수들과 그 역학관계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의 정치력이다. 정치력이란, 좋게 말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럴싸하게 약장사를 하는 능력, 이다. 노무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인 중 최초의 '팬덤'을 가졌고, 순박함이나 깨끗함, 진정성 등으로 치환할 수 있는 확실한 '이미지'를 가졌다. 결국 이것이 '이미지 선거 내지는 미디어 정치'의 출현과 맞물리기는 하겠지만, 그가 그런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는것 만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이토록 슬퍼하고 또 동요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안타깝고 억울하고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심리적으로 동생과 쥐어뜯고 싸우다가 엄마가 오면, 둘이 질세라 더 서럽게 울어대는, 그런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피해자가 되고싶은 심리,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덧붙이자면, 이명박 역시 어떤 의미에서 놀라운 정치력을 지녔다. 안티도 팬이랄까.)

그러나 그의 정치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만큼 적극적"인 노무현에 대해서, "'이명박보다는 백번 나으니’ 아무런 반성할 것도 성찰할 것도 없다" (김규항, 꿈을 잇는 사람들에서 인용)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차기 대권 후보를 점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넘어 그의 존재를 송두리채 긍정하는 이들이 그렇다. 물론, 노무현의 정치에는 의미있는 점이 있었다. 지역주의나 권위주의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국회의원직을 위해 서울의 지역구에서 출마하거나, 비례대표로 출마하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수의 유명 정치인들에 비해, 낙선을 거듭하면서도 부산에서 출마하는 일들은, 우리사회에서,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다. 그러나, 위에도 적었지만, 그 역시도 시위진압에서 사상자를 만들었고, 정치적 양심적 이유로 많은 이들을 구속하거나 수감했으며, 5년의 재임기간 동안 23명의 '열사(김규항, 앞의 글에서 참조)' 를 만들었다. 이명박은 '대운하' 따위의 희귀한 발상으로 우리를 질리게 하고, 노무현의 영정 뒤에 경찰버스로 병풍을 쳐주어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를 표했을 뿐, 기본적인 정책적 기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문제로 우리를 흥분케 했지만, 정작 문제의 원인인 '한미FTA'는 노무현에서 시작한 문제였다. 시청 앞 광장을 막은 경찰들을 미워하지만 노무현은 대추리를 밀어버렸고, 폭력적 시위진압에 분노하지만 노무현은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다. 무엇보다, 2002년 노무현을 선택했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2007년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이명박이 쥐새끼...보다 못한건 맞는데(설치류를 존중하자), 우리는 과연 이명박보다 좀 더 나으면 자랑스러우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사는 세상' 이 되냐는 것이다. (이명박에 대한 욕은 이미 넘쳐나니 내가 굳이 더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결국,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저질의 정권이 출현하게 되었는가?" (groove,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에 대한 서평에서 인용) 의 문제이다. 이것을 해명하지 않고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 인정하자. 미안하지만, 이명박, 노무현이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만들었고. 또 소위 진보진영이라는 이들이 만들었다. 이명박이란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UFO에서 내려와 우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회적 인과관계를 벗어나, '이명박을 몰아내자', 만을 외친다면, 아마 잘 해야 노무현 시즌2 정도가 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승리'에 잠시 도취한 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치고, 몇년 뒤 '경제대통령' 2세가 집권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명박이 집권하게 되었는지, 어째서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지, 왜 경제를 살린다는 한마디면 모든것에 침묵하는지, 어떤 노무현에 기대했고 어떤 노무현에 실망했는지, 왜 개혁에 냉소하고 진보에 등을 돌리는지, 우리는 대답해야만 한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근조 동영상을 만드는 것 보다도, 차기 대선 후보를 점치는 것 보다도, 검찰총장을 몰아내는 것 보다도, '쥐박이'를 욕하는 것 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일이다. 여러 당의 대선 후보들이 한 상대 후보에 대한 비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는 그런 광경을 다시는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게, 우리의 빚이다.


향은 피우지 못했지만 나는 그에게 마음으로 예의를 담아 인사했고,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언젠가 김해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치인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귀향에는 응원을 보냈었다. 그곳에서 좀 더 새로운 일들을 해내길 기대했다. 그가 주민들과 함께 만든 마을을 보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거듭 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우리의 건투를 빈다.


2009/06/06 09:14 2009/06/06 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