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의 몫을 나누기 보다 파이의 크기를 키우자' 중학생쯤 되면 교과서에서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슬로건이다. 곰곰히 생각 해 보면 정말 훌륭한 슬로건이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이 말을 듣고, 파이보다 피자가 좋은데, 따위의 농담이 분명히 나온다. 하지만 절대 다수가 절대적 빈곤에 놓였을 때, 파이가 커진다는 비유는 얼마나 현실적이고 달콤한가. 또한 자본주의:성장-사회주의/공산주의(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청소년에게 구분해서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없다. 이 이야기는 차치하기로 하고.):분배라는 공식을 주입함과 동시에,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작은 파이를 놓고 좀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런것을 일타쌍피라고 하던가. 정말 효율적인 슬로건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듣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특히 북한을 겨냥한)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개인이 각자 논을 갖고 농사짓는 논의 벼는 잘 영글었는데, 공동소유하여 경작하는 논의 벼는 엉망이라고 한다. 반면 논을 공동소유하여 경작하는 이들의 텃밭농사는 비할바 없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공산주의란 허황되고, 비효율적이며,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고, 자본주의적 '소유'와 '경쟁'을 통해 부가 증대된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구태여, 공들여, 전한다. (물론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로 공산주의를 해석한 점이지만, 이 역시 차치하기로 하고.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정의에 대해서도 패스하기로 하자.)
나는 자본주의자가 아니고, 자본주의를 벗어나고 싶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인간이다. 자본주의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 자랐고 자본주의를 배웠고 자본주의를 살고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싶지만, 감히 그 이상을 상상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지 못했다. 지금 하는 '파이'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배운 자본주의의 이야기다.
문제는 '닥치고 경제성장'을 외치는 이들의 주요 레퍼토리인 '파이를 나누기 보다 크기를 키운다'는 이 슬로건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에 완전히 위배된다. 자본주의는 '사적소유'를 전제로 한다. '소유' 하기위해서 '경쟁' 하는 것이다. 자신의 논에서 더 많은 벼를 수확하기 위해서. 즉, 내가 얼마나 더 가질것인가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동력이다. 그런데 왜, 파이에서 만큼은, 내 몫을 챙기지 말라고 하는것인가. 분배라는 것은 결국 생산물이 누구의 몫으로 돌아가는가를 결정하는 행위인데, 파이를 분배하는 것이, 다시 말해 파이를 소유하는 것이, 왜, 자본주의의 성장과 반대되는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 분배하면 성장할 수 없나? 대체 왜 분배와 성장을 대립각에 놓는 것인가. 그리고, 파이를 키운 뒤에 그것의 소유는 누가 결정하나?
기본적으로 이 주장의 파이는 하나가 아니다.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의 파이는 전체적인 파이다. 하지만 숨겨진 파이가 하나 더 있다. '파이의 분배는 미루자'에 나오는 두번째 파이는, 전체 파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미 파이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단호히 금을 그러놓은, 소수의 파이다. 내 파이를 포함한 전체의 파이를 키우자, 하지만 내 파이는 너희의 분배 대상이 아니니 넘보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멜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전체 파이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소수의 파이는 기하급수적으로 그 몫을 늘린다. 그렇기에, 경제 지표가 성장하고, 사회적 부가 증가하지만,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은 증가하지 않고, 여전히 서민경제가 어려우며, 살기가 힘든 것이다.
실제로 그들 소수의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리는 참으로 이중적이라서, 소수(자본)가 소유한 부(파이)는 시장 원리의 기본인 소유의 자유이고 이것을 침해하는것은 경제성장에 저해되며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는 시도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경제적 권리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사회적 부를 깎아먹는 행위로 해석한다. 실제로 그들의 속마음은, 나의 부를 깎아먹는 행위, 일 것이다. 기업의 시장 점유나 전체 부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이익 분배에 대해서는 철저하지만, 사회에 대한 부의 환원에 대해 이야기 하면 그들은 정색하고 말한다. '지금은 합심해서 파이를 키울 때 입니다. 우리가 분열해선 안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배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성장이 이루어지질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선성장 후분배' 라는 말로 성장과 분배를 분리한다. 더 나아가 분배는 성장을 저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임금을 인상하면 기업이 망한다, 직접세는 경기를 위축시킨다. 흔히 하는 이야기다. 세금이 늘어나거나, 임금을 인상하면, 생산비용이 증가해 순이익이 낮아지고, 결국 임금을 감소해야 하므로, 노동자들이여, 단순히 지금 월급 많이 받자고 욕심 내지 말아라,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거다, 라고 엄중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세금을 내면, 세금은 증발하나? 월급을 많이 주면 사람들은 월급통장을 통채 씹어 먹나? 세금으로 기업이나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자하여 생산의 비용을 감소하게 할 수도 있다. 세금으로 사회복지, 그러니까 개인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사회가 지불하여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면, 기업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를 줄일 수 있다. 임금 인상은 역시 가처분소득의 확대가 되고, 개인의 투자심리가 확대되어 기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소비수요가 증가하면 기업의 매출이 증가할 수 있다. 이런 자본과 재화의 흐름이 원활하게 이루어 진다면(사실상 그들이 주장하는 경제적 원리 역시 '원활하게 이루어 진다면'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반론하지 말길 바란다), 세금이나 임금을 인상하는 행위는 실제 지불의 주체가 바뀔 뿐, 부의 증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성장을 저해하는 '분배'가 될 뿐이다.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성장이란, 그들 자신의 부의 성장이고, 분배는 그들의 부를 감소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자본주의의 기본으로 돌아 가 보자. 자본주의는 '분배는 나중에 하자'고 하지 않는다. '분배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이야기한다. '파이의 분배보다 성장'이 아니고, '파이의 분배에 시장 원리 이외에 다른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 슬로건의 본심이다. 나중에 더 커진 파이를 나눠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전경제학의 대부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실제로 사회의 이익을 직접 추구했을 경우보다 더욱 유효하게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가 많다" 고 했다. 이기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의 부를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원리의 핵심이다.
이것을 '파이'로 바꾸어 말해보자. '내 몫의 파이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면 전체 파이의 크기도 커진다.' 하지만 현실은 '네 몫의 파이는 잘 모르겠고, 일단 성장'을 요구하고, 바꿔말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개인은, 분배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은, 이미 자본을 소유한 소수일 뿐이며, 나머지는 '주는대로 먹고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말장난일 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도 혹은 다른 무엇도 아니다. 그냥 '놀부 심뽀' 라고 하면 된다. 자칭 시장주의자, 자본주의자들이여, 속지 말자.
2. 그러나 다시, 파이를 키우자.
뜬금 없겠지만, 그러나 나는 지금 분배를 따지지 말고 파이를 키우자고 주장한다. 생존의 파이다. 우리 사회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보자. 등록금이 없는 대학생은 빚을 지고 자살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는 죽음으로 호소한다. 부모가 일하는 동안 방치된 아이들은 사고로 죽어가고, 철거민들은 제 집을 지키려 싸우다가 불에 타 죽고, 그 싸움에 동원된 어린 경찰도 휩쓸려 죽는다. 여든의 운동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고, 심지어 (임기를 완료한) 전직대통령도 자살한다. 아이도, 젊은이도, 중년도, 노인도, 가릴 것 없이 세상을 떠난다. 이 모든이의 죽음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모두 게을렀나? 그들이 모두 정신적 문제라도 있었나? 그들이 모두 자기관리를 잘못한 것인가?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인가? 우리는 그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나는 열심히 내 삶을 살았을 뿐, 내 책임은 아니라고 눈을 돌린다. 그러나 누군가 뉴타운으로 이득을 본다면, 누군가는 집을 잃는다. 누군가 투자에 성공하면 누군가는 잃게된다. 그것이 내 탓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집을 잃고 파산한 것을 이유로 죽음을 택하는 것을 방치한 것은 분명히 내 탓이다. 더구나 경제지표는 상승한다면서, 왜 누군가는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잃고 있는 것인가. 경제는 성장한다는데 왜 누군가는 빚만 늘어가나. 그리고, 언젠가 내 차례가 오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나. 당신, 그렇게, 잘났나.
생존 파이의 분배를 다투지 말자. 누가 다음에 죽을 것인지 뽑기로 결정하지 말자. 죽음의 파이의 몫을 이웃에게 넘기지 말자. 함께 살아갈 파이를 키우자. 이웃이 죽음을 택하기 전에, 그들의 비명을 듣자. 뉴타운 소식에 귀기울이고 주택 청약저축을 챙기기 보다 누구나 주거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집을 짓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건강보험 가입을 위해 전화를 들기 전에, 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하는 이들을 없게 하자. '입시'정책에 따라다니며 아이들을 혹사시키지 말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필요한 '교육'을 받게 하자. 대졸 20대 청년 실업률을 논하기 보다, 중등교육을 마친 성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의 일원으로 타인의 도움 없이 제 몫을 하게 하자. 요즘 젊은것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인지 돌아보고, 출산률을 이야기 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생각하자. 사업에 실패하고 투자에 망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 삶은 이어가게 하자. 소위 '복지국가'들의 국민들이 게으르다거나 생산성이 낮다고 주장하는 신문기사를 읽기 전에, 서울역의 노숙인들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 물어보자. 노동자의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라는 그럴싸한 말로 비난하기 전에, 노동이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알자. 그리고 나 역시 그 권리와 의무를 위해, 언제든 당당하게 주장하고 싸우자. 불법 시위와 법 질서를 이야기 하기 전에, 그들의 말할 권리가 보장되었는지 확인하고, 교통정체에 짜증내기 전에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 광장을 가로막고, 잔디의 훼손을 걱정하는 이들을 욕하고 냉소하기 전에, 그 광장에서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자. 국론통합과 화해와 용서를 말하기 전에, 그 상처가 아물었는지 살피자.
그만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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